믿음이란

[스크랩] 하나님의교회 성경상식 - 성경으로 본 이스라엘의 역사 [신약편]

별소녀 2016. 1. 1. 23:01

하나님의교회 성경상식 - 성경으로 본 이스라엘의 역사 [신약편] 



[ 성경상식 ]


성경으로 본 이스라엘의 역사- 신약편


성경은 온 인류의 역사와 과거, 혹은 미래를 기록하고 있다.
과거 지나온 발자국을 통해 무지한 행동을 삼가고
 미래의 기록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살펴볼 수 있다.










헤롯대왕이 죽던 B.C. 4년, 유다 베들레헴 작은 마을 마구간에서는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을 따라 메시아가 탄생했다. 인류에게 영원한 자유를 가져다줄 구원자였으나 정작 이스라엘은 그릇된 신앙관으로 모세 시대에 권능을 베풀던 그 하나님을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권능의 하나님은 유다의 가장 작은 고을, 그것도 마구간에서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렇게 초라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유다, 보아스, 이새, 다윗, 솔로몬, 르호보암, 아비야, 스룹바벨, 요셉의 계보로 태어났다.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 14대가 지났고, 다윗부터 바벨론에 점령당할 때까지 14대, 그 이후 그리스도까지 또다시 14대가 흘렀다. 성경에서는 영적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의 태어나심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특히 마태, 마가, 누가, 요한 4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복음의 행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또한 인류의 죄 사함과 영생을 위해 당하신 고난, 우리가 앞으로 가야 할 천국에 대한 비유, 부활의 소망 등도 기록돼 있다.


예수님은 서른 살에 요한을 통해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고 복음사역을 시작했다. 예수님께서 처음 전하신 복음은 이스라엘 민족들의 ‘회개’였다. 당시 종교를 장악하고 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외침이 못마땅했다. 특히 그들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니, 하나님이니 하는 말에 분개했다. 신성모독이라는 죄를 씌웠다. 결국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유월절 밤을 보내고 가룟 유다에 의해 대제사장에게 넘겨졌다. 갖은 모독과 조롱, 채찍질에 수욕을 당하신 다음 날, 예수님의 3년 복음 생애는 십자가로 끝이 났다. 그런데 놀라운 사건이 발생했다. 예수님께서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이다. 이 부활 사건은 예수님을 믿었던 모든 사람의 마음에 성령의 불씨로 남았다. 그리고 그 불씨는 예수님의 부활 후 50일째인 오순절을 맞아 타오르기 시작했다.


예수님께서 내려주신 오순절의 성령으로 예루살렘에 국한됐던 그리스도의 복음은 소아시아 지역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그 무렵부터 유대교인과 그리스도교인은 확연히 차이가 났다. 여호와 하나님만을 부르짖으며 구약의 율법을 준수했던 유대교는,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으며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율법을 준수하는 그리스도교가 눈엣가시와도 같았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유대교의 술수와 로마의 핍박 등 이중고를 겪으면서도 굳건한 믿음을 키워나갔다.


이때 로마 시민이자 유대교의 열성 신자였던 사울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회심한 사울은 이름을 바울로 개명하고 지중해와 소아시아 일대를 다니며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전파했다. 신약성경의 27권 중 절반을 사도 바울이 기록한 것으로, 그의 신앙관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에도 기독교인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소아시아로 전파되고 있을 무렵 A.D. 36년경, 이집트에 거주하고 있던 그리스인(헬라인)과 유대인 사이에 작은 소요가 일어났다. 그리스인들은 유대인 성전에 로마 황제의 신상을 세우려 했고, 이를 거부하던 유대인들이 황제의 신상에 절하지 않는다 하여 고발했다. 당시 로마는 이집트를 비롯한 주변국을 정복한 뒤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황제를 신격화함으로써 로마에 대한 충성심을 끌어내려 했다. 그러나 유일신을 섬기는 유대인들은 황제에게 충성은 했으나 신으로서의 황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스인과 분쟁을 시작으로 유대인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고, 이집트에 파견됐던 로마 행정관은 편파적으로 유대인들의 안식일 집회를 금하는 법령을 내렸다.


그 후 유대인들의 소요는 끊임없이 일어났다. 유대인들은 종교적 핍박뿐 아니라 로마의 폭정에도 불만이 많았다. 유대에 파견된 로마 행정관 14대 총독인 플로루스는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유대인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일부러 유대인을 충동시키고 반란을 유발시켰다. 이 일이 발단이 되어 66년에 와서는 제1차 유대 반란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곳곳에 반란이 일어나자 네로 황제는 경험이 풍부한 베스파시아누스 장군과 그의 아들 티투스 장군을 유대에 파견했다. 2년 후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의 부대는 갈릴리를 함락하고 이어 예루살렘 성까지 포위했다. 하지만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승리를 눈앞에 둔 시점에 네로 황제가 자살하여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군의 철수를 두고 이스라엘은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로마의 철군은 누가복음 21장 20절의 예수님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때 예수님의 예언을 믿었던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펠라로 도피했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대부분의 유대교인들은 예루살렘에 남았다. 그리고 2년 뒤 70년, 로마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는 아들 티투스 장군과 8만 대군을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그때까지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으며 이번 전쟁에서도 승리할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예루살렘은 로마군에 의해 참혹하게 짓밟혔다. 하나님의 예언을 무시했던 이스라엘은 110만 명이 사망하고 9만 7천 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예루살렘 함락 당시 유대인 일부는 사해 서쪽에 위치한 요새 마사다로 퇴각해 최후까지 항전했으나 이 역시 3년 만에 막을 내렸다. 이제 예루살렘에는 유대인의 출입이 허락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이때부터 유럽과 소아시아 곳곳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더욱 적대적이고 배타적인 성향으로 변하며 가는 곳마다 크고 작은 분란을 야기시켰다. 115년 트리야누스 황제 때 유대인들은 또다시 소요를 일으켰고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유대인들은 몰살당하기도 했다. 이 일로 로마에서는 유대인들에 대한 나쁜 소문이 퍼졌고 핍박도 끊이지 않았다.


2년 뒤 하드리아누스가 황제로 등극했을 때 그는 지난 1차 유대 반란 당시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해 식민 도시로 삼으려 했다. 성전 재건 소식을 들은 유대인들은 성금을 모으며 마음을 합했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건축한 성전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성전과는 많이 달랐다. 그는 네로 황제처럼 그리스풍을 좋아해 예루살렘 성전에 주피터의 신상을 세우도록 했다. 이 일은 또다시 유대인들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오히려 유대인의 항거를 탄압했고 결국 유대인들은 132년 바르 코크바를 메시아로 삼고 제2차 유대 반란을 일으켰다.


제2차 유대 반란은 3년간 지속됐고 로마군 1군단이 전멸하는 등 로마에 큰 패전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는 최고의 명장인 세베리우스와 정예 부대 22군단을 파견해 유대 반란군을 정복했으며 이 사건은 반란 대장인 바르 코크바의 죽음과 함께 유대 마을 985개가 훼파되고 58만 명이 죽음으로 끝이 났다. 이때부터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광적으로 유대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에는 주피터의 신전이 세워졌고 예루살렘 성의 이름을 황제의 이름으로, 유대 땅 이름을 팔레스티나로 바꾸었다. 이와 함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예루살렘 인근에 유대인의 그림자만 얼씬해도 처형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게다가 로마 전역에서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게 금지령을 반포했다.


한편, 유대인들은 로마의 탄압이 거세질수록 그 미움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렸다. 그들은 1차 유대 반란 당시 예수님의 예언을 믿어 예루살렘을 탈출했던 그리스도인들을 두고 민족의 배신자로 여겼다. 그런 데다가 2차 유대 반란 때는 반란군들이 바르 코크바를 메시아로 믿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어 동조하지 않은 것을 두고 반란의 실패를 모두 그리스도인들에게로 돌렸다. 사실 반란도 유대인들이 일으켰고 그에 대한 대가도 유대인들에게 내려졌지만 유대인들은 그 모든 핑계를 그리스도인에게 두고 미움의 대상으로 삼았다. 결국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탄압보다 오히려 유대인의 질시와 핍박을 더 견뎌야 했다.


1, 2차 유대 반란이 지나고 나자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곤란에 빠졌다. 안식일이 되면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눈을 피해 밤에 몰래 모였다. 당시 로마는 야간 집회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어 야간에 모이는 그리스도인들을 범죄 집단이나 이상한 집단으로 오해했다. 이런 오해는 그리스도교 즉 기독교를 불법적인 종교로 여기게 했고 종교적 박해로 이어졌다.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는 그의 저서에서 기독교인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조롱과 멸시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홍수나 지진, 기근과 같은 자연재해가 기독교 때문이다. 인육을 먹는 집단이다. 기독교인들은 악질적인 병균이다. 근친상간을 범하고 어린아이들을 제물로 바친다’ 등의 오해는 기독교인들을 점점 설 곳이 없도록 만들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지하 무덤인 카타콤 등에서 예배를 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위해 순교하는 기독교인의 행실과 진리에 감동돼 기독교는 급속도로 전파되며 많은 유대인과 지식인들을 흡수시켰다.


개종한 지식인들 중에는 변증가라고 불리는 콰드라투스, 아리스티데스, 유스티누스, 테오필루스, 테르툴리아누스 등이 있다. 이들은 지금껏 핍박에 잠잠했던 기독교인들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기독교를 변호하고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오해를 풀기 위해 변증서를 기록해 황제에게 보내기도 했다. 또한 변증가는 기독교가 유대교와는 다르며, 로마의 호의를 얻어내기 위해 로마가 가지고 있는 이교 사상이나 철학 사상과 기독교가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이후부터 조금씩 사람들의 인식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변한 것은 사람들의 인식뿐만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계명과 초기 기독교인들의 진리도 조금씩 변했다. 마침내 313년 2월,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밀라노 칙령을 통해 로마 전역에 기독교를 공인했고 기독교에 대한 박해도 멈추게 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은 기독교를 더욱 파급적으로 전파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그만큼 진리를 더욱 심하게 변개시키는 계기가 됐다.


375년, 대제국이었던 로마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은 로마의 분열을 가속화 했고 동서로 분열됐던 로마 제국은 후에 열 나라로 갈라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의 중요성은 심화되어 갔다. 밀라노 칙령 이후 교회의 세력은 정치 세력과 맞먹을 만큼 팽창됐다. 특히 로마 교회의 양상은 행정기능이 마비된 상황을 대신해 시민들을 보호하고 게르만 민족의 교화와 문화 전달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 유대교보다 더 우월한 처지에 놓이게 된 기독교는 이스라엘을 벗어나 유럽으로, 아시아로 퍼져나가면서 정체성을 잃어갔다. 이는 538년 동고트의 멸망을 시작으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는 1798년까지 1260년간 종교 암흑시대의 역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어쨌든 로마의 분열은 이스라엘 민족의 분열로 이어졌고, 로마의 지배가 끝난 7세기경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떠난 예루살렘을 이슬람교 세력이 약 400년 동안 점령했다. 그 후 1099년 유럽 각지에 흩어져 있던 기독교 국가들은 제1차 십자군 전쟁을 위해 원정길에 나섰다. 자신들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의 손에서 해방시킨다는 목적이었지만 모슬렘의 반격으로 곧 후퇴했다. 제1차 십자군 원정은 13세기까지 여덟 차례나 이어졌다. 200년이 넘는 전쟁을 치르지만 끝내 십자군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전쟁은 유럽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교통로를 만들었고 많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그 길을 따라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 후 예루살렘은 맘루크 왕조와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놓이게 된다. 1517년에는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면서 예루살렘과 가자, 갈릴리 등지로 유대인들의 이주가 더욱 늘어갔다. 1897년 시오니즘 운동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는 계기가 됐다. 1917년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영국은 밸푸어 선언으로 유대인의 국가 건설을 지지했다. 그러나 1900년 가까운 유랑생활 속에서 드디어 국가 건설을 눈앞에 두고 있던 유대인들은 1930년대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홀로코스트를 겪게 된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나라 없는 백성이 감수해야 하는 아픔이라 여긴 유대인들은 더욱 독립에 박차를 가했고 결국 1948년 5월, 텔아비브 박물관에서 이스라엘 국가의 독립을 선포하게 된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멸망과 독립을 예언했고 세계의 역사는 이 예언에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성경의 예언은 이제 이스라엘에서 동방 해 돋는 땅 끝 나라 대한민국으로 옮겨졌다. 그곳에 등장하시는 구원자를 영접할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축복과 그들이 걸어가는 믿음의 길에 대해, 그리고 그들의 영적 승리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과 흥망성쇠를 함께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영적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과 축복을 인도해가고 계신다.


출처 - 하나님의교회 [패스티브]

출처 : 이단 연구소와 진리 연구소
글쓴이 : 라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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